우리말을 더욱 풍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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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다. 아무래도 최근 우리말보다는 외래어나 외국어, 인터넷 용어, 정체 불명의 어휘를 많이 쓴다고 사람들이 걱정도 많이 하고, 또 한글날이 국경일임에도 공휴일은 아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영어 등 외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일각의 움직임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며 "과연 100년 후에도 한국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동안 생각하고 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1. 한글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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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글과 한국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글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문자 역사상 최고의 알파벳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한글과 한국어를 동일시하고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글을 사용해야 하고, 한글은 응당 한국어를 위한 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세계에 흩어진 많은 언어 가운데에는 문자를 가지지 못한 것들이 많다. 대부분의 경우 이처럼 문자를 가지지 못한 언어는 영어를 비롯한 라틴계 알파벳을 이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언어를 익히는 경우와 문자를 익히는 경우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글이나 영어의 알파벳과 같이 음소(音素)를 기준으로 한 문자는 배우기가 수월해 쉽게 보급할 수 있다. 글자 하나 하나를 익혀야 하는 한자나 지극히 제한된 음 밖에 표현하지 못하며 그것도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하나의 문자를 이루는 일본의 가나와 비교해 한글이나 영어의 알파벳은 정말 익히기 쉽다. 예전에 일본에서 온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한글 읽는 법을 가르쳐 준 기억도 난다.

이처럼 문자가 없는 언어에 보급할 새로운 대안으로 한글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아프리카 어떤 언어에 한글이 문자로 보급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아직 정확한 출처를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단지 뜬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표준말과 사투리

이미 대한민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서울·경기 지역에 살고 있고, 또 이 지역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보니 언어에 있어서도 마치 이 지역의 말투나 어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서울·경기가 아닌 타 지역 출신들이 처음 이들 지역으로 들어와 살면서 말투나 억양 때문에 생기는 에피소드는 단순한 웃음거리를 떠나 그들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도 한다.

게다가 방송에서는 죄다 표준말을 사용한다. 드라마의 경우 심지어 배경이 되는 지역이 경상도이건 전라도이건 강원도이건 상관 없이 주인공은 대체로 표준말을 구사한다. 사극의 경우에는 옛말을 그대로 쓰지도 않는다. 아주 가깝다고 할 조선 시대만 해도 억양이나 어휘가 완전히 틀릴진데, 시청자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죄다 "현재 서울의 교양있는 중산층이 구사하는 언어"를 쓰고 있다. 조정의 대신들이라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말투를 쓸 법도 한데, 사극을 만들면서 전혀 그러한 배경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없어서인지 모조리 표준말로 전하께 읍소를 하고 있다. 최근에 드라마 등에서 간혹 촌스런(!) 주인공이 구수한 사투리를 쓰며 등장하기도 하지만 짜잔하고 배경이 바뀌는 순간 어느새 표준말을 구사하는 멋진(!) 청년/숙녀가 되어 있다. 그 이전에 사투리는 깡패나 촌뜨기 아주머니나 쓰는 말투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투리의 경우, 표준말이 가지지 못한 풍부한 어휘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또 표준말에서는 이미 사라진 어휘의 용례나 흔적을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은 조선 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성조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처럼 사투리 역시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일 뿐인데, 이를 마치 표준말에 비해 열등하거나 촌스러운 언어로 치부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 편견이며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현재 서울 지역의 교양있는 중산층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정의한 표준말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접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 지역에 흩어진 많은 풍부한 어휘를 더욱 흡수함으로써 문화적인 개성과 존중이 스며든, 그리고 더욱 풍부한 어휘 생활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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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조어

다음으로는 최근 말이 많은 신조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제(10월 8일), 국립국어원이 사전에는 없는, 근래 들어 새로 생긴 말 즉 신조어를 수록한 책을 출판했다는 기사가 났다.

많은 이들은 신조어에 대해 거부감이 많고 정체 불명의 언어라고 하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대개의 경우 큰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는 시시각각 변하며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 언어가 유행하고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어는 서서히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언어 생활의 한 부분을 더욱 풍족스럽게 할 디딤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러한 언어들이 우리 언어 생활을 완전히 망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된 어휘는 완전히 우리 일상에 정착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어휘는 또한 서서히 우리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비록 우리가 "신작로(新作路)"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지만 일제 시대나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울 수 있는 어휘로 쓰이듯 말이다.




많은 이들이 풍부하지 못한 우리말의 어휘를 탓하곤 한다. 외국 사람들은 자기네 말인데도 사전을 끼고 또 동의어 사전(thesaurus)을 이용하며 더욱 풍부한 낱말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우리는 우리말 공부는 하지 않고 외국어 공부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한글과 한국어에 관해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딱딱하고 정형화된 생각을 조금만 부드럽게 열어 둔다면 그러한 문제는 조금씩 완화되지 않을까? 사투리건, 신조어이건, 인터넷 용어건, 정체 불명의 이모티콘이건, 그것이 의사 소통에 무리가 없고 언어 생활을 더욱 풍족하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어느덧 한글날 저녁이 저물어 간다. 일년에 단 하루, 한글날만이라도 이런 마음과 생각의 여유를 열어 두는 것은 어떨런지···.

Posted by EXIFE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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