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국가의 미래를 들먹이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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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차
  2. 본문
    1. 여전히 진행중인 ICU 논란
    2. 시작에 앞서
    3.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시각
      1. ICU의 현실에 대한 글
      2. ICU의 미래에 대한 글
      3. 불편한 글, 수긍이 가는 글
    4. 솔직해지자
  3. 관련 글



여전히 진행중인 ICU 논란

최근 ICU 즉 정보통신대학교의 향후 진로에 관한 논의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지난 글에서는 ICU의 설립과 급격한 성장, 설립 당시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KAIST(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와의 통합 논의까지 다루었다. 지난 글에서 다룬 기사의 마지막은 2007년 10월 11일자였다.

20일 정도 지난 10월 29일까지만 해도 특별하다고 할만한 사건은 없었다. 10월 18일 정보통신부 국정 감사에서 유영환 정보통신부 장관이 “기본적으로 ICU와 KAIST 간 통합에 찬성”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것 정도였다. 하지만 11월 14일 현재의 상황을 보면 조금 다르다. 그 사이 새로운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지난 11월 5일, 정보통신부가 ICU와 KAIST를 통합하기 위해 통합에 찬성하는 교수와 학생, 학부모와 물밑 작업을 해 왔음을 보여 주는 녹취록이 발견되었다. 어쨌거나 ICU 논란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시작에 앞서

동일한 사건이라도 어떤 사람이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나 누군가의 이해(利害) 관계가 얽힌 경우에는 글을 쓰기가 더욱 신중해진다. 혹시 내가 글을 쓰면서 내 주관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이 아닌지 하고 다시 돌이켜 보게 된다. 이렇게 글을 쓰더라도 객관적인 시각만을 유지하면서 글을 썼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전혀 상관 없는 글을 쓸 때에도 이럴진대, 자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더욱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옛 속담처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에게 유리한 시각으로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흔하다. 더욱이 주위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주변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하여 객관성을 잃은 시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ICU 학생들이나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주관이 반영되지 않기를 기대하는 일이 더욱 힘들 것이다.

오늘 쓰는 글은 최근 ICU 사태에 관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 ICU 학생들이 조금 더 침착을 유지하고 더욱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게 되었다. 본문 중에 쓴소리가 담기더라도(솔직히 말하면 좀 심하게 썼다)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는 의도라고 받아 주기를 바란다.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시각

내 판단에는 현 ICU 사태에 대해 가장 심각하고 급박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ICU 재학생이 아닐까 한다. 그 다음이라면 아마도 입학을 앞둔 예비 ICU인, 그 다음이 졸업생이 아닐까? 물론, ICU를 직장으로 둔 교직원들과 교수진도 있겠지만 내 입장이라면 자신의 직장이 사라지는 일보다는 모교가 사라진다는 충격이 더할 것 같다.

마침 자신이 ICU 학생임을 밝히고 이에 관한 생각을 드러낸 글과 주위에서 ICU를 바라보는 글이 많아 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볼까 한다.


ICU의 현실에 대한 글

현재 자신들이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에 관해서라면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뿐 아니라 바깥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글들은 내부인이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 시도한 글이다.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

아무래도 이에 관한 글은 이번 사태에 대해 다룬 글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다음 글이 이에 대한 심각성과 문제점을 아주 잘 요약한 것 같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학교(ICU, 한국정보통신대학교)가 시끄럽다. 학부생들은 상당수 자퇴까지 결의한 상태다. 문제가 뭔가? 한 줄로 요약이 된다. "ICU는 정보통신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사립대학이다."
(중략)
뭐가 잘못된 건가? 어디서 잘못된 건가? 아흔아홉가지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우기만 좋아하는 성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중략)
그런데 학교를 세운 것은 업적이어도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업적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정보통신부는 혹이 되어버린 학교를 털고 싶다.

[ 신묘군의 에세이 블로그, 녹슨 그네 — ICU 사태에 부쳐, 2007/10/05 ]

외부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글
당장 내일 정통부 앞에서 있을 시위 준비가 한창이고 또한 네티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네이버 검색어 1위로 만드려는 시도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한가지 느낀 게 있다면, 대덕 연구단지에 위치한 이 조그마한 학교에는 다들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다.
친구들에게 검색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 다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뭐 때문에 통합하려고 하느냐고 묻는 가 하면, 아직까지도 '통합설'로만 알고 있고, 우리들은 통합을 원한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너무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Eggu's weird laboratory, ICU 사태?, 2007/10/05 ]


ICU의 미래에 대한 글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통합 반대 의견과 찬성 의견, 그리고 ICU 특별법안에 대한 의견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미 ICU 학생들은 <ICU 특별법>이라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따라서 통합 논의에 대한 글만 소개한다.

통합 반대 의견

이분은 KAIST에서 학부를, ICU에서 석·박사를 하신 분이다. 2006년 12월에 작성된 글이지만 2007년 10월에도 동일한 글을 트랙백으로 남긴 것으로 보아 주장에 변함이 없다고 판단된다. 합당한 이유 없이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서 ICU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사태를 안타깝게 여기며, 동시에 ICU와 KAIST는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난, 학부를 KAIST에서, 석사, 박사를 ICU에서 마친 KAIST 동문이면서, ICU 동문이다. 애써 신생학교이지만 비젼을 보고, 없는 곳에서 이만큼의 모습이 되기까지 힘껏 노력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곳인데... 그 ICU가 없어지고, KAIST 이름만 남는다니까.. 기분이 좋지 않다..

그것도 정말 합당한 원리가 있는게 아니라 정치적 논리에 의한 여야 싸움에 의해서 통합론이 계속 이야기 되는게 엄청 짜증난다.

ICU와 KAIST는 독자적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면서 발전해야합니다.

통합반대!!!

[ Dr.Lee's Blog, KAIST-ICU 통합 반대, 2006/12/19 ]

KAIST와의 통합

다음은 통합 찬성 의견이다. 아래에 세 가지 주장하는 바가 등장하는데, 이미 허운나 총장이 사퇴 의사를 표명했으니 3번은 해결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ICU 학생들이 주장하는 것은 3가지입니다.

1. ICU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 되기 전까지 정통부와 ICU는 끈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
2. 실현 가능성이 없는 자립화에 반하여, 현실적 대안이 되는 KAIST와의 통합을 지지한다.
3. ICU 구성원의 입장과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 총장은 사퇴하라!

[ 우리 모두는 특별하다, ICU 학생들이 바라는 것 + ICU와 KAIST 통합에 대해 카이스트 측이 가지는 생각, 2007/10/08 ]


불편한 글, 수긍이 가는 글

이 아래의 글들이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가장 관련있지 않을까 한다. 이들 글에서는 ICU 학생들이 모교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논리적인 비약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내용이 보이기도 했다.

다른 길 대신 선택한 일

아래에 인용한 글은 이번 사태에 대해 비교적 잘 정리한 글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비치는 주장이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글에서는 ICU 사태를 단순히 학교 차원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이공계의 문제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물론 ICU 사태가 대한민국 이공계 문제의 일부일 수는 있다. 하지만 ICU 학생들은 다른 좋은 길 놔 두고, 다른 인지도 높은 학교를 놔 두고 굳이 이렇게 힘든 곳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태 해결을 위한 직접적 근거를 이용하여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니까’라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를 마치 대한민국 이공계 전체의 문제인 양 확대하는 것도 불편하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을 것으로 안다. "KAIST랑 통합되면 좋은 거 아냐? KAIST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과대학이잖아" 라고..

그렇다. 내가 외부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의 학생으로서 느끼는 것은 외부 사람이 느끼는 것과 차이가 있다.

나부터도 서울대학교 최초합격하고 ICU 선택했다. 이건 솔직히 많이 쪽팔리는 말인데 난 ICU 정시 '예비합격자' 중에서도 거의 제일 마지막이다. 나 뒤로 1명있는 걸로 알고 있다.

(중략)

이 글을 보시는 네티즌 여러분, 제발 도와주세요.
ICU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세요.
저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이공계의 이야기입니다.

[ 우리 모두는 특별하다, 한국정보통신대(ICU) 사태의 핵심, 2007/10/05 ]

아래의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목부터가 “서울대 연고대 버리고”로 시작하는 글. 게다가 대한민국 2만불 시대의 주역이 ICU라고 주장한다. 정보통신부에서 ICU를 포기하는 이유가 2만불 시대의 새로운 주역을 찾았기 때문이냐고 묻는다. 사태 해결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다. ICU를 지키고 ICU의 이념을 살려 나가야 하는 근거가 단지 다른 학교 포기하고 여기로 왔고,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세금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글은 아무리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정보통신부와의 문제는 사실 풀기 힘든 문제임이 이미 이전 글인 “ICU의 출범에서 현재까지, 그 10년의 이야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빌 게이츠니 글로벌 IT 리더니 하는 표현도 조금 과장되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ICU가 글로벌 IT 리더 양성을 위해 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마치 ICU가 아니면 글로벌 IT 리더가 나올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게다가 국민 소득 2만불 시대를 여는 데 있어서 IT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국민 소득 2만불 시대를 여는 데에는 IT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주장도 일종의 어거지임을 잘 알지 않는가.
– 우리는 서울대 연고대 의대 약대 합격통지서를 포기하고 IT 공부하겠다고 대전에 모인 소수의 학생들입니다.
– 새벽두시까지 숙제하면서 아 우리 너무 노는것 같아 라고 걱정한 학생들입니다.
– 우리는 이제까지 돈한푼 안내고 세금으로 귀한 수업을 들어온 학생들입니다.

(중략)

5000억원 들인 학교를 정보통신부에서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IT 리더 양성은 더 이상 필요없는 모토가 되어 버린 걸까요?
제가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이에 제가 모르는 한국의 빌게이츠가 여러명 등장한 것일까요?
2만불시대의 주역은 IT라고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벌써 2만불시대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주역들을 찾았기 때문인가요?
전자이던, 후자이던 둘 중에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라영씨이야기, 서울대 연고대 버리고 ICU 왔더니, 2007/10/05 ]

아래에 인용한 글은 블로그의 주인이 직접 작성한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한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인용한다. 이 글에서는 정말 불편한 부분이 있다. “당신들 위해서”라는 부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가며 공부했건만 이제는 배신당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이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른 채 입학한 학생들 입장에서는 굳게 믿던 사람이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벌써 2년 남짓 지났구나
ICU에 합격하고 폴캠프에 들어와서 난 내가 ICU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정권이 바뀌면 ICU가 망한다?
IT없으면
KOREA는 없다.
그리고 지금 그 정치인들이 개판 또라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당파싸움이 심하더라도
자신들의 인지도를 위해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표를 위해서
IT를 빛낼 ICU를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다.
이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거게 아니었던것 같다
그들은, 우리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나?

(중략)

지금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는 상황인데, 그 미래를 빛내기 위해, 힘든거 감수하고 피터지게 공부해 여기까지 온 우리들은, 당신들 위해서 여기까지 공부해온 우리들은 뭔데?

[ Σ月血兒流의 버뮤다 삼각지, ICU 사태 종합(글이 길더라도 부디 읽어주십시오), 2007/10/05 ]

입장의 변화를 요구하는 글

이 분 역시 ICU 재학생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담담하게 글을 써 나가고 있다. 본인이 밝힌 것처럼 비록 이번 사태의 지리한 논의 때문에 이미 지쳐버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학교 본관을 지나가다보면 플래카드에 "ICU=지잡대?" 이런 문구가 있었다. 남들 시선 자극하기 딱 좋은 표현? 왠지 ICU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들기 쉬운 문장이다. ICU 사람들의 우월감(?) 뭐 이런게 잘 들어나는 대목이다. 누가 저런 아이템을 생각해 냈는지 참 궁금하다.
저런 마인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sunhoNet, ICU- KAIST 통합 논의와 관련하여, 2007/10/05 ]


솔직해지자

지금부터는 조금 불편하고 언짢은 소리를 하게 될 것 같다. 독설을 쏟아 붓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대들은 선택받은 자인가?

이제 내가 느낀 거북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다른 이들이 현실에 대해 쓴 글을 인용한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결국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ICU와 KAIST가 통합을 해야 하느냐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이전 글인“ICU의 출범에서 현재까지, 그 10년의 이야기”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ICU는 출범 당시부터 이런 문제가 생길 소지를 안고 탄생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 사건의 결말이 나건 전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나건 저런 결론이 나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또 반대하는 의견이 생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시하는 것은 이번 사태를 대하는 ICU 학생들의 태도이다. 물론 앞서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블로그 검색을 통해 살핀 많은 글에서 자신들은 사실상 “선택된,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사람들이니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켜 달라는 주장을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내가 글을 잘못 읽었나 싶었다.

그래, 여러분들 똑똑한 거 잘 안다. 하지만 이번 주장에서 논리적인 비약이 지나치다는 부분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서울대 연고대 의대 약대 포기하고 대한민국 2만불 시대의 주역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다? IT가 없으면 Korea(여기에 대한민국 대신 Korea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의아하지만)가 없다? 미래를 위해 힘든 걸 감수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우리, 좀더 솔직해지자

IT가 없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말은 뭐 딱히 잘못됐다고 이야기하기도 그렇긴 하지만, IT 업종에서 종사하는 내가 보기에도 참 낯간지럽다. IT가 중요하고 앞으로 그 중요성이 더 커질 가능성이 큰 분야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처럼 큰 규모의 국가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분야가 비단 IT 하나 뿐이겠는가. IT보다 훨씬 많은 노동 창출 효과를 갖는 기계나 자동차 산업은 중요하지 않은가? IT 이후의 산업이라고 불리는 BT나 금융 산업은 또 어떻고? 연예 사업 역시 우리 나라의 이름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건 또 어떻길래?

정보통신 산업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사실이다. 아니,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어쨌거나 나 역시 이공계 출신이고 현재 IT 계열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대체로 이런 이야기에는 자신이 그러한 선택을 포기하면서 손해를 감수했다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이공계라는 선택을 했다는 식의 논리는 곤란한 거 아닌가? 서울대건 연고대건, 의대건 약대건, 아니 법대건 뭐 아니면 무슨 전공이건 그러한 분야 역시 중요한 분야이고, 또 이공계라는 길을 선택한 것은 타인의 선택이 아닌 본인의 몫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 가면서 이 길을 택한 것이라 주장하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 어디에 있을까. 당신들이 그 길을 택한 건 당신들이 원해서였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진로를 바꾸어 의학대학원으로 진학하건, 로스쿨에 들어가건, 사람들은 이공계의 위기를 이야기하지 당신들을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치 판단 없이 단지 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만을 위해 자신의 진로도 희생할 수 있는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였나? 자신의 관심사나 이익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그 속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진로를 선택하고 공부하고 있었나?

또, 정보통신 분야의 리더를 키우는 곳이 반드시 ICU이어야 하나? ICU는 정보통신 산업을 위해 아주 잘 특성화된 학교니, 이곳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나? 글을 보면 뭐,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에서 보는 게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이미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본 내 입장에서는 어느 학교 출신이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물론 학교마다 작은 차이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비슷한 학생들이 들어가 공부하는 비슷한 환경의 학교라면 그마다 장단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차라리 그냥 ‘우리는 우리 모교가 지금처럼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정도의 주장이면 좋겠다. 하지만 현재의 주장에는 자신들이 (심지어는 서울대 연구대 의대 약대를 갈 수 있는) 똑똑하고 중요한 존재이니만큼 잘 대해 주기를 바란다는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게 풍긴다. 특히나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으로 학교 본관에 걸려 있었다는 “ICU=지잡대”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지방대로 인정받고 싶지도 않고, ‘잡대’라는 표현은 더욱 듣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우리 나라 어느 대학생이 그런 소리 듣고 싶겠나? 하지만 저런 표현에는 의도했건 그러지 않았건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내 현재의 위치와 미래가 불안해서 그런다고 그래라. 나중에 내 입지가 흔들리면 어떡하나 불안해서 그런다고 그래라. 차라리 그런 현실적인 주장이 다른 분야나 다른 학교 학생들을 비하하는 표현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들리니까.


주장의 설득력이 부족한 이유

지금까지 ICU 학생들의 주장을 살펴 보았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그런 주장만으로는 ICU 학생들의 입장과 주장에 동조하고 그들을 도와야 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 그런 걸까? 문제의 요점을 다시 한번 살펴 보자.

ICU가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지금까지 정보통신부로부터 받아 오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ICU가 이처럼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정보통신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사립대”라는 데 있다. 이렇게 되니 국립대도 아닌데 정부 지원을 받으니 국회의원들에게서 뭇매를 맞고, 사립대인데 다른 학교에 비해 특혜를 받고 있으니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견제를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러다 보니 곤란해지는 건 당연히 정보통신부이다. 정보통신부 입장에서는 이제 ICU가 떼버리고 싶은 “혹”이 된 것이다.

자, 이제 정보통신부는 혹(ICU)을 뗄 준비가 됐다. 때마침 KAIST에서는 교수와 학생을 충원해 규모를 불리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총장을 위시한 몇몇 사람들은 통합을 반대하고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니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통합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아한 부분이 있다. 내 입장이라면 내가 다니는 학교가 없어진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 같은데, 학생들은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설령 내가 다니는 학교가 소위 위에서 이야기한 그 “지잡대”일지라도 내 젊음과 열정과 청춘이 담긴 학교라면 없어지는 게 서운하고 기분나쁠 것이다. 내가 정말 의아한 부분은 정말 내가 학교를 사랑하고 내 분야를 사랑하고 있다면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존하게 되더라도 학생과 교수진·교직원이 힘을 합해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너무나 쉽게 통합에 찬성하더라는 것이다. 불과 1년도 안된 기간에 모두들 찬성하고 나선다. ICU가 애시당초 정부 지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학교였나?

밖에서 보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의아하고 이상한 게, 왜 필사적으로 통합을 반대하는 학생은 없을까하는 점이다. 도대체 ICU와 정보통신부 사이의 기기묘묘한 관계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내놓은 게 왜 KAIST와의 통합이었을까? 틀림없이 학교 측에서는 사립화 추진을 위한 조사단도 마련해 놓고 있었는데 말이다. 현재 KAIST는 국가 지원만으로는 세계적 위상을 가진 대학이 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외부로부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현재 ICU의 통합론자들의 주장도 이해할 수 없다. KAIST에서는 사실상 사립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왜 ICU에서는 그런 노력도 하기 전에 통합론부터 대두되었을까? KAIST와 통합해서 손해볼 게 없다는 판단이 섰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이런 일로 나라 팔아먹지 마라

ICU 학생들, 다들 똑똑하고 훌륭한 인재들인 거, 인정한다. 졸업하고 나서 나중에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원동력이 될 IT 분야에서 큰일을 할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 긍정한다. 그렇지만 운도 지지리도 없지, 정치의 희생양이 되게 생겼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아닌 국가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공부했다거나, 자신들이 아니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거나, 이런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마라. 당신들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당신들이 나중에 정치가가 될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할 사람이 될 생각이라면 이런 일로 국가의 미래를 들먹이지는 말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진심으로. 나라 이름을 함부로 팔아먹는 건 정치인들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니까.


사족(蛇足)

사실 내가 보기에도 ICU와 KAIST가 통합한다고 해도 서로에게 손해가 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다. 통합 후에는 대외적인 인지도에 대한 재고도 가능할 것이고, 재정적인 면에서도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과학기술부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부의 합법적인 지원도 가능해진다면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나. ([참고] 이 부분이 KAIST 학생들의 입장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댓글을 읽고, 이 부분은 좀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삭제함 - 2007/11/25.)

하지만 이러한 통합 논의에 앞서 ICU의 독립적 생존 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고 바로 통합 논의만 오가게 된 상황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통합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충분한 논의가 오간 후에 감정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는 주장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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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XIFE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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