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U의 출범에서 현재까지, 그 1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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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ICU의 존폐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부인의 입장에서 현 사태가 도대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시작했으며 무엇이 현안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언론 검색을 통해 나름대로 ICU의 현재와 과거에 대해 정리하였다.
[ 알립니다 ]
본 내용이 현재 ICU의 현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작성한 것이며, 혹시 잘못된 정보나 누락된 내용 등이 있으면 댓글을 통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사용자 삽입 이미지ICU 로고
  1. 목차
  2. 본문
    1. 개교
    2. 학부 과정 신설
    3. 발전과 생존 사이에서
    4. 통합 혹은 사립화
  3. 요약



본문

개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양승택 ICU 초대 총장 ICU 즉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ICU)'라는 긴 이름(약칭 '한국정보통신대학원')의 학교는 애시당초 출발부터 삐걱댔다. 1997년 5월,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 전문 대학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그 이름을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으로 정했다. 독립된 캠퍼스는 차후 마련하기로 하였다. 대전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개원하였고 초대 총장이 양승택 정보통신연구원장이었다. 말 그대로 당시 '한국정보통신대학원'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부설 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학교 이름에 '한국'이 들어가 있지만, '국립'이 아닌 '사립'이었다. 설립 당시 교육부의 반대에 부딪쳐 KAIST(카이스트, 한국과학기술원)와 같은 특수목적대가 아닌 사립학교법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게다가 1999년 8월 20일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정보통신 산-학-연 공동연구센터 10월 설립"이라는 기사를 보면, ICU가 설립되면서 ETRI에서 책임급으로 있던 연구원들 다수가 ICU 교수로 갔다는 내용이 보인다. 사실 ICU가 설립되던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ETRI에서 퇴직이 다가오는 연구원들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해 ICU가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 딱히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한국정보통신대학원(ICU)은 1998년 3월 개교한다. 첫 입학생은 석사 과정 87명, 박사 과정 27명, 총 114명이었으며, 당시 학부 과정은 없었다. 석박사를 합해 600명 정도의 정원에 매년 200명 정도를 신입생으로 모집하겠다는 목표의 절반에 밖에 미치지 못하는 인원이었다. 준비에서 설립까지 총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ICU는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학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바로 1년을 3학기제로 운영한 것이다. 비록 방학 기간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대신 조기 졸업이 가능하게 된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 6월부터는 상시 학생모집 제도를 시행하고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ICU는 그저 정보통신부에서 설립한 IT에 특성화된 대학 정도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학부 과정 신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안병엽 ICU 2대 총장 그런데 2001년 3월, 당시 정보통신부 안병엽 장관이 IMT-2000 사업자 문제와 관련하여 잡음이 일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ICU의 양승택 초대 총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사실은, 안병엽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ICU의 2대 총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규정상 ICU의 총장은 박사학위 소지자여야 하는데, 안병엽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박사 학위가 없었다. 하지만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는 프리미엄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랬는지, 총장추천위원회와 이사회가 내부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안병엽 전 장관을 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현 ICU 총장이 되고, 전 ICU 총장이 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되다니, 그 이후의 일은 뭐, 말 안해도 훤히 보이는 일일 터. 참고로, 안병엽 전 장관은 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학사, 일본 히도츠바시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정보통신부 차관 및 장관 출신이다.

2001년 4월, ICU는 2002년 3월을 목표로 학부 과정을 신설하여 매년 400여명의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6월 교육인적자원부에 대학설립 계획서를 제출하기로 한다. 하지만 ICU의 학부 설립 추진은 시작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충남대, 공주대 등 대전 충남 지역 대학은 ICU가 학부 과정을 신설하면 지방대학이 고사한다며 반대했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소속 193개 대학 총장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졸업생이 감소하기 때문에 새로운 학부를 신설하는 것보다 기존 학과의 개폐 등을 통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며 ICU의 학부 설립을 반대했다.

어쨌거나 많은 반대 여론에 부딪쳐서인지 2001년 10월, ICU는 학부 입학 정원을 당초 400명 예정에서 120명 선으로 대폭 줄여 2002년 3월 개교하기로 결정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11월 30일, ICU 학부 과정 설립을 인가한다.

우여곡절 끝에 ICU 학부 과정은 2002년 2월 23일, 공학부 75명, 경영학부 30명, 총 105명의 첫 입학생을 맞게 된다. 당시 석·박사 과정의 명칭은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학부 과정의 명칭은 "한국정보통신대학교"였다. 이렇게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운영되던 석·박사 과정과 학부 과정은 2003년 12월 15일, ICU는 이사회에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폐지안을 상정하고 이를 한국정보통신대학교가 승계하는 형식으로 안건을 의결함으로써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두 개의 학교를 운영해야 했던 이유는 고등교육법 상 석·박사 과정만 둘 수 있는 단설 대학원 제도에 따르면 대학원 대학교는 학사 과정을 둘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2월 23일, 교육인적자원부는 대학원과 학사 과정의 통합을 인가한다.

그런데 2004년 7월, 국가 기관이나 공공 기관은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없음에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정보화촉진기금을 재원으로 사립학교 형태의 학교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느슨하게 했다는 질타를 받는다. 학부 설립 자금에 적정한 검토 없이 지원된 금액만 1,041억원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기숙사 설립 자금으로 500억원이 지원되었지만 학부가 설립되면서 대학원 기숙사 용도로 100억원이 추가적으로 중복 지원되는 등 방만한 운영 사실도 드러났다. 애시당초 설립될 수 없는 학교였던 것이다.

당시 ICU는 대학 발전 기금으로 2년 간 116억원 가량을 기부받는 등 대학 성장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당시 교수 1인당 연구비는 광주과학기술원(5억 6천만원), ICU(3억 7400만원), 포항공대(3억 2400만원), KAIST(2억 9200만원) 순이었다.


발전과 생존 사이에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허운나 ICU 3대 총장 2004년 5월, ICU는 3대 총장으로 허운나 전 국회의원을 선정한다. 허운나 신임 총장은 서울대 영문학과,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문헌정보학 석사 및 동 대학 교육공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민주당 및 열린우리당 국회 의원 출신이다.

어쩌면 당시부터 현재 ICU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허운나 총장이 취임한 지 한 달이 된 2007년 7월 말, ICU는 사립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 특수목적대나 국립대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큰 이슈였다. 우선 특수목적대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재정 자립을 해결하는 것이 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국립대 전환은 요원한 일이었다. 2004년 11월 당시 KAIST(카이스트)에서는 신임 로버트 러플린(Robert Laughlin) 총장이 학교 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한나라당 일부 의원이 ICU 국립화에 강력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ICU는 특별법안을 추진하면서 대학 운영 기금을 정보화촉진기금과 지방자치단체의 출연금과 기부금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반대론자들은 정보화촉진기금의 사용처가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국립대 신설을 반대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당시 KAIST(카이스트)의 로버트 러플린 총장은 KAIST(카이스트)가 생존해 나갈 길로 사립화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에 ICU는 국제화를 통해 살길을 모색하기로 한다. ICU는 아시아 허브(hub) 대학을 목표로 2004년 말부터 2005년 초까지 말레이시아, 중국, 인도, 베트남아시아 각국의 대학을 방문해 외국인 학생 유치에 힘쓰고 교류를 확대하여 중·장기적으로는 석·박사 과정 학생의 40%를 외국인 학생으로 확충키로 한다.

이런 와중에 2005년 2월, ICU 첫 학사 졸업생 15명이 배출된다. 학사 졸업생을 배출한 직후인 2월 16일, 허운나 총장은 ICU와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 논의는 단견에 불과하다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2월 18일, 정보통신부가 제정 재추진 중이었던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법안'은 당시 참여정부의 대학 구조조정 원칙에 역행하는 것이며, 지역 발전 균형에도 맞지 않고, 게다가 대학교가 이미 포화된 상태라며 재차 반대 의견에 부딪힌다. 이러한 논란 속에 2005년 9월, 광주과학기술원에도 학사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2005년에 이르러 ICU는 상당한 대외적 인지도를 갖게 되어 '국내 이공계의 트로이카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2005년 9월 ICU의 2006학년도 수시모집 결과 85명 모집에 380명이 지원해 평균 4.5대 1의 경쟁률을 보임으로써 설립 당시 정원에도 미치지 못했던 인지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005년 9월에는 ICU 재학생은 졸업 후 진로로 ETRI를 1순위로 꼽았다는 기사가 가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006년이 되면서 대외 협력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정보통신연구원(KISTI),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KT, 한글과컴퓨터 등과 상호 협정을 맺고, 아프가니스탄이나 중동 7개 대학, 아프리카 4개 대학과의 교류 협력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정보화촉진기금의 부적절한 투자가 문제시되기도 하는 등 아직 향후 어떻게 생존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갈길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2006년 5월, ICU 노조는 대학발전기금으로 직원들이 모금한 급여 인상분 천만원을 기탁한다. 또 6월에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석좌교수로 추대했다.


통합 혹은 사립화

2006년 9월, 또다시 KAIST(카이스트)와 ICU와의 통합 논의가 일어난다. 기사에 따르면 KAIST(카이스트)에서는 학부부터 점진적인 통합을 기대하고 있으나, ICU 측에서는 학생 및 교수 양측에서 통합에 대해 극심한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10월, 허운나 총장은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설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현 체재 유지나 자립을 통한 사립화 추진을 고려 중이라고 밝힌다. 같은 시기 국회에서는 'ICU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측과 '현재 ICU가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상황으로, 통합을 통해 IT 분야에 대한 경쟁력을 재고할 수 있다'는 측의 의견이 서로 맞섰다. 11월, ICU는 2012년까지 완전 사립화를 목표로 한다며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 논의를 다시 한번 일축했다. 12월, 이사회는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2007년 4월 결정하기로 한다. 한편 ICU 학부생 35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298명 중 96%가 통합을 반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ICU에서 우려한 것은 '흡수 통합'으로, KAIST(카이스트) 재학생이 약 7500명인 반면, ICU는 930명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노조도 통합 반대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을 들여 학교 부지 등을 인수할 국내 기업을 물색하기 힘든 점 등 민영화의 현실적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남표 KAIST 총장 2007년 1월, ICU에서는 '민영화 추진 전담반'과 'KAIST 통합 추진 전담반' 두 개의 태스크포스를 가동한다. 두 개의 안 중 실현 가능성이 높은 안을 4월 이사회에서 선택한다는 방안이었다. 한편, 2006년 새로이 KAIST(카이스트)를 맡게 된 서남표 총장재정 자립화를 위한 노력 등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해 가고 있었고, 단계적으로 신입생 정원을 1,000명까지 늘리는 등 KAIST(카이스트)의 규모를 늘일 방안을 찾고 있었다. 2007년 3월, 서남표 총장은 ICU와의 통합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을 나타낸다.

하지만 4월, 통합 논의에 대한 이사회가 열렸다는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이사회가 6월 29일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통합 추진파와 사립화 추진파 사이의 주장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결국 차기 이사회로 사안이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차기 이사회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7월 23일, ICU에서는 통합 찬성 의견이 급격히 증가한다. 재학생 응답자의 85%, 교수 응답자의 89%, 학부모 응답자의 94%가 통합을 지지한다. 하지만 직원 노조 응답자의 71%는 통합에 반대했다. 한편 ICU는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을 주장해 온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을 학교 명예 훼손을 이유로 고소했다. 이에 김영선 의원은 맞고소 의사를 내비쳐 사태가 더욱 커져간다. 하지만 여전히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던 9월 27일, 이번에는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학생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이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10월 5일에는 정보통신부 앞에서 사태 해결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당초 사립화를 지지했으나 실질적인 자립화 방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통합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운나 총장은 여전히 사립화 방안을 고수했다. 한편, 노준형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ICU 이사장직을 사퇴하고 2008년도 ICU 운영비도 배정받지 못하는 등 정보통신부와 ICU가 점차 결별 수순을 밟게 된다. 정보통신부는 통합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그를 위해서는 KAIST 법 개정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ICU 이사진 간의 입장 및 견해도 크게 차이가 나 사태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인다.

논란 속에서 10월 8일, 허운나 총장이 학교 측에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자 9일, ICU는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에 대한 고소를 철회한다. 이에 김영선 의원 측도 맞고소를 취하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허운나 총장 사퇴를 계기로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까지 1997년 5월부터 2007년 10월 11일까지, 약 10년에 걸친 ICU의 역사를 살펴 보았다.



요약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98년 개교한 ICU(당시 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현 정보통신대학교)는 IT 전문 교육 기관으로 출범했으나 KAIST(카이스트)와 같이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사립학교법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지만 정보통신부 및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채 10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임에도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19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초반 거세게 몰아쳤던 IT 열풍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2004년, 국립대가 아님에도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여타 사립대와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고 학교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일면서 사립화 혹은 국립화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한다. 이때 처음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 논의가 대두되나, ICU 측에서는 전적으로 이를 거부한다. 그러던 와중 정보화촉진기금이 ICU에 부적절하게 쓰였으며, 또한 방만하게 운영되었음이 드러나면서 사태에 대한 논란이 증폭된다.

2005년 및 2006년, 사립화냐 통합이냐를 놓고 많은 갈등이 있음에도 ICU 측은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돌파구를 모색하기보다는 국내외 연구 기관 및 교육 기관을 통한 대외 협력 사업에만 치중한다.

2006년 9월, 다시 한번 KAIST(카이스트)와의 통합 논의가 발의되지만 교수, 학생, 학부모, 노조 모두 통합에 반대한다. 하지만 허운나 총장이 통합을 반대하고 이사회 측에서 사립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자 결국 2007년 9월, ICU 학생들이 통합을 촉구하며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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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XIFE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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