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얽힌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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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어느 화창한 봄날—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이었다. 월배—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 지구—에 있는 친척집에 갈 일이 있어서 지금은 사라진 22번 버스를 타고 갔다.

당시 내가 살던 대명동에서 월배까지는 40분 정도 거리였는데, 그때만 해도 버스 배차 간격도 들쑥날쑥했고 버스 기사들의 친절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던 시절이라 빠르게 가면 빠르게 가는대로, 느리게 가면 느리게 가는대로 거기 맞춰 승객이 적응하던 시절이었다.

하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당시 중고등학생이던 형, 누나들로 가득했다. 뒷쪽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앞에서 뒤로 나가지 못하고 꼼짝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마침 내 앞자리에 계시던 분이 자리를 일어서서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른쪽 창가로 멋진 풍경이 지나가고 앞으로 승차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버스 가장 오른쪽 앞자리였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나 잠들 수 있다! 그날도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었다. 어차피 월배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고, 푹 자고 일어나도 상관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얼마나 잤었나···. 급정거하는 버스 때문에 눈을 떴다. 어떤 정류장 앞에서 선 것이다. 눈앞에 어떤 할아버지께서 타신다. 내가 누구인가! 왕 깍듯한 나 아닌가! 할아버지께 제발 이 자리에 앉으셔야 한다며 자리를 양보했다. 그런데 기대 밖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럴 필요 없다며 한사코 내 제의를 거절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거듭 또 거듭 부탁드린 끝에서야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뒤를 돌아 선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버스 안에는 운전 기사와 나, 할아버지, 이렇게 세 사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고···. 보아하니 아직 10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나는 하차문 바로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날 이후 나는 버스에 타면 그 즉시 무슨 수를 써서든 하차문 뒷쪽까지 몸을 옮긴다. 앞쪽에 빈자리가 생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2

아마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하차문 뒷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하던 훈훈한 시대였다. 운좋게 자리를 잡은 나는 다른 사람 가방을 무릎에 하나 얹어 두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할머니께서 버스에 오르시는 것이다. 대신 가방을 맡았던 학생에게는 다시 가방이라는 묵직한 짐이 넘겨지겠지만,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그분의 대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 할머니 아니거든요?"

정말 무안하더라. 앉으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앉아 있기도 그렇고. 어쨌든 일단 일어서서 버스 맨 뒷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 아주머니, 자리에 앉으시기는 하셨는데, 아···! 얼굴 쳐다보기도 미안하고···.


Bonus #1

이번에는 지하철에 얽힌 사연. 내가 대구를 떠나 대전으로 온 직후 대구에는 지하철이 생겼다. 지하철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러 가기가 참 불편했는데, 지하철이 생긴 이후에는 그나마 많이 편해져 한결 편안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대구 지하철 1호선 종점이던 진천역에서 내리면 되는 상황이니 지하철 안에서 마음놓고 잘 수도 있었다.

어느 주말,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진천역을 두 세 정거장 정도 남겨 두고 그만 잠이 들고 만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잠들 수 있는 나, 도착지 직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 눈을 떴는데, 다행히 진천역인 것이다! 큰일날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내려야 할 곳의 반대 방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계속 자다가 지하철 차량 기지를 통과하고, 다시 그 지하철을 타고 나온 것이다! 지금도 생기는 의문 하나. 도대체 지하철 차량 기지에서는 뭘 하는 것일까? 승객이 지하철 안에서 잠들어 있는데 발견하지도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그냥 놔 둔 것일까? 나 말고도 이런 사람 많을 텐데···.



P.S.
아마도 2000년 전후였던 것 같은데, 대구에 계신 부모님, 동생들을 만나러 가다가 한번 당황한 적이 있다. 열차에서 내려서 보니 버스 노선이 완전히 다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근데 이번에 또 대구 시내버스 노선 개편한단다. 설마 지하철 노선을 개편하지는 않겠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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