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서남표 총장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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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KAIST(한국과학기술원)에서 '테뉴어(tenure)' 교수 자격 심사에서 신청자 35명 중 43%인 15명이 탈락하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얻고 있다. 이는 최근 일련의 개혁 작업을 주도해 온 서남표 총장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로버트 러플린(Robert Laughlin)
로버트 러플린(Robert E. Laughlin)

KAIST는 2004년 5월, 국내 대학 총장 가운데 처음으로 노벨상 수상자인 스탠포드대학교 응용물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러플린(Robert E. Laughlin)을 총장으로 선임했다.

러플린 총장은 KAIST가 본받아야 할 모델로 미국의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을 꼽으며 새로운 입시 전형과 내부 교육 시스템에 대한 개정안을 발표할 것이라 얘기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온 것이 2004년 12월에 발표한 <KAIST의 사립화>였다.

그가 제시한 비전 제안서를 보면 KAIST는 실질적인 비지니스 플랜이 없어 정부 지원이 없으면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하고 재정 자립화를 위해 등록금 징수, 정원 확대, 학부 커리큘럼 수정, 돈 버는 졸업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 등을 제시했다. 또 대학원 중심의 이공계 대학에서 벗어나 의대, 법대 및 MBA 예비반을 신설하는 등 비이공계를 망라하는 학부 중심 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금세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국내 대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혁신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 찬성파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론을 펼친 반대파 사이의 팽팽한 대립을 빚었다.

결국 러플린 총장의 개혁안은 다수의 반대에 밀려 한 발자국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2005년 3월,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고 교과 과정을 확대하며 제도를 점진적으로 수립해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 후 별다른 이야깃거리 없이 연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결국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2006년 3월) KAIST 교수협의회에서는 연임 반대 의견이 89%, 학생의 41%는 연임을 찬성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학생들의 경우 개혁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대외 인지도 및 평판이 높아졌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 러플린 총장의 퇴임은 그의 독단적인 리더십이나 교수협의회와의 불화 등이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남표
서남표

이러한 상황에 서남표 미국 MIT 기계공학과 석좌교수가 KAIST의 새로운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총장 선임 이후 그는 사립화 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교수의 영향력 증대를 위해 기초 과학이나 응용 과학, 양 극단의 특정 분야에 연구를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안정적인 비지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는 전임 러플린 총장과 서남표 총장이 합의를 한 셈이다.

전임 러플린 총장이 교수 및 지역민들과 잘 화합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심어 준 반면, 서남표 총장의 경우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것이 의도한 바였든, 그렇지 않든, 서남표 총장은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근본적으로 러플린 총장과 서남표 총장의 문제 인식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추진 과정이나 구성원들의 태도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남표 총장은 2006년 9월 이미 KAIST 발전 기금 모금과 교수 영년제(테뉴어, tenure) 제도 개선을 통한 교수 교체 등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고, 이에 대한 주장을 수시로 내비쳤다.

서남표 총장의 개혁 추진은 점점 구체화되어 갔다. 테뉴어 심사에서 교수들이 무더기로 탈락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학점이 낮은 학생들에게는 학점에 따라 장학금을 차등 지급(혹은 미지급)하기로 하고, 새로 부임하는 교수의 연구 업적을 높이 사 테뉴어를 주기도 했으며, MIT 출신의 KAIST 첫 20대 여성 교수를 임용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중간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추진의 결과 재미 사업가인 박병준 회장으로부터 발전 기금 1,000만 달러를 기부받기도 하였다.


이번 테뉴어 심사 탈락에 관한 각계의 반응은 충격이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결국은 가야 할 길이고 지금까지 국내 대학이 안주해 있던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반응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당연히 이러한 개혁 추진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들과의 관계 설정이 앞으로 KAIST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주지 않을까.



후기
이 글을 작성한 시기가 2007년 10월 2일, 오늘은 2011년 4월 11일. 처음 글을 작성하고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찾아 읽고는 마지막 줄에 눈이 한번 더 가게 됐습니다. “개혁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들과의 관계 설정이 앞으로 KAIST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줄 것이다”는 내용이지요. 당시 제 판단에 개혁은 필요한 일이고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카이스트 문제가 참으로 떠들썩합니다. 실업계 고교 출신으로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자살한 학생을 필두로 급기야 이번에는 교수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서남표 총장의 개혁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뜨거운 화두입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면 서남표 총장이 이야기했던 개혁이란 참가자(학생이건 교수건) 모두를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싸움을 시켜 이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쓰러지게 만드는 비정한 세계라는 점을 확인할 뿐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성적 건만 봐도 그렇습니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학점을 주게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성적 미달이 되지요. 모두가 다 열심히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하게 만드는 게 게임의 룰입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외부에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카이스트 내부의 문제가 하나씩 드러나게 됐습니다. 비록 이번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지만 앞으로 이들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EXIFE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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