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烏竹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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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오죽헌(烏竹軒)으로 정했습니다. 사임당 신씨의 친정집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이기도 합니다. 건축사적으로도 한국 주택 건물 중 가장 오랜 축에 속해 그 의의가 크다고 합니다. 매표 시간은 하절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30분, 동절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관람 시간은 하절기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동절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입니다. 관람료는 성인 3,000원, 청소년과 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이며 65세 이상은 무료입니다.


눈이 많이 내린 뒤지만 사람들의 통행에는 불편이 없도록 잘 정돈해 두었더군요.


율곡 이이의 동상과 그 앞에 놓인 견득사의(見得思義,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라 적힌 표석입니다. 이 말이 율곡 이이의 말인가 해서 찾아 보니 그런 것은 아니더군요. 원래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예절을 실천하기 위한 아홉 가지 마음가짐인 구사(九思)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검색을 하니 이렇게 나오네요.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자장왈 사견위치명 견득사의) — 자장이 들려 주었다. “공동체의 일꾼은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얻을 일이 생기면 옳은지 어떤지 생각에 집중한다”.
구사(九思)
  1. 시사명(視思明): 눈으로 볼 때는 분명하게 보려고 생각한다.
  2. 청사총(聽思聰): 귀로 들을 때는 참뜻을 밝게 이해하려고 생각한다.
  3. 색사온(色思溫): 얼굴 표정을 지을 때에는 항상 온화하게 하려고 생각한다.
  4. 모사공(貌思恭): 모습은 공손하게 하려고 생각한다.
  5. 언사충(言思忠): 말을 할 때는 참되고 정직하게 하려고 생각한다.
  6. 사사경(事思敬): 일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하려고 생각한다.
  7. 의사문(疑思問): 의문 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아 배우겠다고 생각한다.
  8. 분사난(忿思難): 분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이로 인해 재앙이 생기게 될 것을 생각한다.
  9. 견득사의(見得思義) : 자기에게 이득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 이득이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지는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네요.


아들이 신나게 눈밭을 노니는 이곳은 <신사임당 초충도(申師任堂 草蟲圖) 화단>이라는군요. 사임당 신씨가 그린 초충도는 조선 숙종 임금이 감탄했다고도 하네요. 이 그림 속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봉선화 등을 소재로 화단을 조성한 곳이라고 합니다.


들어가는 길에 보니 <오죽헌 선비 문화체험관> 기공식이 행해졌더군요. 2015년 12월까지 공사를 진행한다니, 조만간 여기에서 새로운 건물을 하나 보게 될 것 같네요.



오죽헌 안내도입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⑨ 입지문(立志門) 앞입니다. 들어가게 되면 넓은 정원 오른쪽으로 ① 자경문과 ② 유적정화기념비, 왼쪽에 ⑧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그 뒤로 ③ 문성사, ④ 오죽헌, ⑤ 바깥채, ⑥ 안채, ⑦ 어제각이 있습니다. 안내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릉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요 철인이며 정치가로서 구국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1564) 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인 최치운(1390~1440)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아들은 지난 겨울 대전에서 구경하지 못한 눈 구경에 신이 났고···.


입지문(立志門)입니다.


앞에는 거울···이 아니라 강릉의 관광지를 안내해 주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고장난 거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동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리판의 반사율이 너무 심해서 거울처럼 보일 뿐이고, 게다가 디스플레이가 너무 어두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 봐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강릉시에서 예산이 확보된다면 이런 건 얼른 수정해 주면 좋겠네요.


입지문(立志門)으로 들어가려면 계단 밖에 없는데 유모차를 끌고 있어서 옆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유모차나 휠체어도 잘 지나다닐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비탈길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유모차를 끌고 가기 좋더군요.


유물전시관 옆에 나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정원이 펼쳐집니다.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답게 군데군데 검은 대나무, 오죽을 심어 뒀네요.


우선 어제각(御製閣)을 찾았습니다. 어제각은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했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눈이 어찌나 쌓였는지 바깥채와 안채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눈에 파묻혔습니다. 이름 그대로 안채는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이며,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곳입니다.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건물에는 격몽요결의 한 구절과 율곡제 초대전에 출품한 글씨들이 걸려 있습니다.


바깥채와 안채입니다.


안채 뒤뜰에서 자라고 있는 오죽(烏竹)입니다.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어서 까마귀 오자를 써서 오죽이라고 부른답니다.


저는 한옥을 볼 때면 처마 끝이 참 이뻐 보입니다.


눈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와. 오죽헌의 뒤편입니다.


이 건물이 오죽헌(烏竹軒)입니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柱心包)양식에서 익공(翼工)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는 이 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 뒤로 문성사(文成祠)가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 文成)’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이제 밖으로 나가려는데···.


“사임당 배롱나무”라는 게 있습니다.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한데, 원래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랍니다. 6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는군요.


이렇게 다시 밖으로 나오니,


<율곡 선생 유적 정화 기념비>라는 게 세워져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유물전시관>이라고 돼 있던 건물인데, 현판에는 <율곡기념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율곡기념관 앞에 안내문이 하나 서 있습니다.
율곡선생 행장기(栗谷先生行狀記)

율곡 이이 선생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 이곳 오죽헌 몽룡실에서 이원수(李元秀)공과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 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 살에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 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을 지어 입신행도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물두 살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 살 진사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스물한 살 한성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스물세 살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스물아홉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이조좌랑·홍문관교리·우부승지·사헌부대사헌·예문관제학·사조(호조·형조·병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서른세 살(1568년)에는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교육자·철학자이자 경세가인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언봉사>를 지어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동호문답>과 <성합집요>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도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때 <격몽요결>과 <학교모범>을 저술하였다.
1584년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율곡기념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입구에 대형 디스플레이로 전시관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전달 내용이 없을 때에도 바탕에 은은한 한지 무늬를 깔아 보기가 참 좋습니다.


율곡기념관은 사임당 신씨와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 기증한 작품들로 세워졌습니다. 다들 대단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황기로(1521~1575(?)), 뒤에 나올 옥산 이우의 장인입니다.


옥산 이우(1542~1609),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칠남매 중 넷째 아들입니다.


이매창(1529~1592), 신사임당의 맏딸이자 이이의 누나입니다.


신사임당 가계도. 칠남매인데 위로부터 이선(1524~1570), 이매창(1529~1592), 이번, 둘째 딸, 이이(1536~1584), 셋째 딸, 이우(1542~1609) 순입니다. 당대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네요. 심지어 신사임당조차, “인선”이라는 이름 대신 “사임당”이라는 호만 널리 알려져 있으니 말이죠.


초충도를 시각화한 영상물.





신사임당(1504~1551)



오죽헌


율곡 이이(1536~1584)


눈이 녹아 내리는 모습이 꼭 빗물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돌아서는 길.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기웁니다.






Posted by EXIFE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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